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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의 감옥제도로는 사람을 작은 죄인으로부터 큰 죄인을 만들 뿐더러 사람의 자존심과 도덕심마저도 마비시켰다. 예를들면 죄수들은 어디서 무엇을 도둑질하던 이야기, 누구를 어떻게 죽이던 이야기를 부끄러워함도 없이 도리어 자랑삼아서 하고 있었다. 그도 친한 친구에게면 몰라도 초면인 사람에게도 꺼림이 없고, 또 세상에 드러난 죄도 아니고 저 혼자만 아는 죄를 뻔뻔스럽게 말하는 것을 보아도 그들이 감옥에 들어와서 부끄러워하는 감정을 잃어버린 표다. 사람이 부끄러움을 잃을진대 무슨 짓은 못하랴. 짐승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감옥이란 이런 곳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최명식과 함께 소제부의 일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죄수들이 부러워하는 '벼슬'이다. 우리는 공장에서 죄수들에게 일감을 돌려주고 뜰이나 쓸고 나면 할 일이 없어서 남들이 일하는 구경이나 돌아다녔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최 군과 나와는 죄수 중에서 뛰어난 인물을 고르기로 하였다. 내가 돌아보다가 눈에 띄는 죄수의 번호를 기억하고 명식 군도 기억하여 나중에 맞추어 보아서 둘의 본 바가 일치하는 자가 있으면 그의 내력과 인물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으로 우리는 한 사람을 골랐다. 그는 다른 죄수와 같이 차리고 같은 일을 하지마는 그 눈에 정기가 있고 동작에도 남다른 데가 있었다. 나이는 40내외였다. 인사를 청한즉 그는 충청북도 광산 사람이요, 5년 징역을 받아 이태를 치르고 앞으로 3년을 남긴 강도범으로 통칭 김진사라는 사람이었다. 나는 누구며 무슨 죄로 왔느냐고 묻기로, 나는 황해도 안악 사람이요, 강도로 15년을 받았다고 하였더니 김진사는, "거, 짐이 좀 무겁소 그려."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가 나에게 '초범이시오?' 하기로 그렇다고 대답할 때에 왜 간수가 와서 더 말을 못하고 헤어졌다.  내가 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본 어떤 죄수가 나에게 그 사람을 아느냐 하기로 초면이라 하였더니, 그 죄수의 말이, "남도 도적 치고 그 사람 모르는 도적은 없습니다. 그가 유명한 삼남 불한당 괴수 김진사요. 그 패거리가 많이 잡혀 들어왔는데 더러는 병나 죽고 사형도 당하고 놓여 나간 자도 많지요." 하였다.
 그랬더니 그날 저녁에 우리들이 벌거벗고 공장에서 감방으로 들어올 때에 그 역시 벌거벗고 우리 뒤를 따라서, "오늘부터 이 방에서 괴로움을 끼치게 됩니다." 하고 내가 있는 감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퍽이나 반가워서, "이 방으로 전방이 되셨소?" 하고 물은즉 그는, "네. 아, 노형 계신 방이구려." 하고 그도 기쁜 빛을 보인다. 옷을 입고 점검도 끝난 뒤에 나는 죄수 두 사람에게 부탁하여 철창에 귀를 대어 간수가 오는 소리를 지켜 달라 하고 김진사와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내가 먼저 입을 열어, 아까 공장에서는 서로 할 말을 다 못하여서 유감일러니 이제 한 방에 있게 되니 다행이란 말을 하였더니 그도 동감이라고 말하고는 계속하여서 그는 마치 목사가 신입 교인에게 세례문답을 하듯이 내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 첫 질문은, "노형은 강도 15년이라 하셨지요?" 하는 것이었다.
 "네, 그렇소이다."
 "그러면 어느 계통이시오, 추설이요, 목단설이시요? 북대요? 또 행락은 얼마 동안이나 하셨소?"
 나는 이게 다 무슨 소린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추설', '목단설'은 무엇이요, '북대'는 무엇이며, '행락'은 대체 무엇일까?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는 것을 보더니 김진사는 빙긋 웃으며, "노형이 북대인가 싶으오." 하고 경멸하는 빛을 보였다.
 내 옆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죄수 하나가 김진사를 대하여 나를 가리키며, 나는 국사범 강도라, 그런 말을 하여도 못 알아 들을 것이라고 변명하여 주었다. 그는 찰강도라 계통 있는 도적이었다. 그의 설명을 듣고야 김진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째 이상하다 했소. 아까 공장에서 노형이 강도 15년이라기에 위아래로 훑어보아도 강도 냄새가 안 나기에 아마 북대인가 보다 하였소이다." 한다.
 나는 연전에 양산학교 사무실에서 교원들과 함께 하던 이야기를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세상에 활빈당이니 불한당이니 하는 큰 도적 떼가 있어서 능히 장거리와 큰 고을을 쳐서 관원을 죽이고 전재를 빼앗되 단결이 굳고 용기가 있으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동작이 민활하여 나라 군사의 힘으로도 그들을 잡지 못한단 말을 들었는데,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자면 견고한 조직과 기민한 훈련이 필요한즉 이 도적 떼의 결사와 훈련의 방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하여 두루 탐문해 보았으나 마침내 아무 단서도 얻지 못하고만 일이었다.
 사흘을 굶으면 도적질할 마음이 난다고 하지마는 마음만으로 도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니 거지도 용기와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담을 넘고 구멍을 뚫는 좀도둑은 몰라도, 수십 명 수백 명 떼를 지어 다니는 도적이라면 거기는 조직도 있고 훈련도 있고 의리도 있으려니와 무엇보다도 두목되는 지도자가 있을 것인즉 수십 명 수백 명 도적 떼의 지도자가 될 만한 인물이면 능히 한 나라를 다스려 갈 만한 지혜와 용기와 위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김진사에게 도적 떼의 조직에 관한 것을 물었다. 그런즉 진사는 의외에도 은휘함 없이 내 요구에 응하였다.
 "우리 나라의 기상이 다 해이한 이때까지도 그대로 남은 것은 벌과 도적의 법뿐이외다." 라는 허두로 시작된 김진사의 말에 의하면, 고려 이전은 상고할 길이 없으나 이조시대의 도적 떼의 기원은 이성계의 이신벌군의 불의에 분개한 지사들이 도당을 모아 일변 이성계를 따라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소위 양반들의 생명과 재물을 빼앗고 일변 그들이 세우려는 질서를 파괴하여서 불의에 대한 보복을 하려는 데서 나왔으니, 그 정신에 있어서는 두문동 72현과 같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도적이라 하나 약한 백성의 것은 건드리지 아니하고 나라 재물이나 관원이나 양반의 것을 약탈하여서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구제함으로 쾌사를 삼았다. 이 모양으로 나라를 상대로 하기 때문에 자연히 법이 엄하고 단결이 굳어서 적은 무리의 힘으로 능히 5백 년간 나라의 힘과 겨루어 온 것이었다.
 이 도적의 떼는 근본이 하나요, 또 노사장이라는 한 지도자의 밑에 있으나 그 중에서 강원도에 근거를 둔 일파를 '목단설'이라고 부르고, 삼남에 있는 것을 '추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설에 속한 자는 서로 만나면 곧 동지로 서로 믿고 친밀하게 되었다. 이 두 설에 들지 아니하고 임시임시로 도당을 모아서 도적질하는 자를 '북대'라고 하는데 이 북대는 목단설과 추설의 공동의 적으로 알아서 닥치는 대로 죽여 버리게 되었다.
 노사장 밑에는 유사가 있고 각 지방의 두목도 유사라고 하여 국가의 행정조직과 방사하게 전국의 도적을 통괄하였다. 일년에 일차 '대장'을 부르니 이것은 한 설만의 대회였다. 대회라고 전원이 출석하기는 불가능하므로 각 도와 각 군에서 몇 명씩 대표자를 파견하기로 되었는데, 그 대표자는 각기 유사가 지명하게 되며 한 번 지명을 받으면 절대 복종이었다.
 이 '장' 부르는 장소는 흔히 큰 절이나 장이 열리는 거리였다. 대소공사를 혹은 의논하고 혹은 지시하여 장이 끝난 뒤에는 으례 어느 고을이나 장거리를 쳐서 시위를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대회에 참예하러 갈 때에는 혹은 양반으로 혹은 등짐장수로 혹은 장돌림, 혹은 중, 혹은 상제로 별별 가장을 하여서 관민의 눈을 피하였다. 어디를 습격하러 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세상을 놀라게 한 하동장 습격은 장례를 가장하여 무기를 관에 넣어 상여에 싣고 도적들은 혹은 상제, 혹은 복인, 혹은 상두꾼, 혹은 화장객이 되어서 장날 백주에 당당히 하동 읍내로 들어간 것이었다.
 김진사는 이러한 설명을 구변 좋게 한 후에 내게, "노형, 황해도라셨지? 그러면 연전에 청단장을 치고 곡산원을 죽인 사건을 아시겠구려?" 하기로 아노라고 대답하였더니, 김진사는 지난 일을 회상하고 유쾌한 듯이 빙그레 웃으며, "그때에 도당을 지휘한 것이 바로 나요. 나는 양반의 행차로 차리고 사인교를 타고 구종별배로 앞뒤 벽제까지 시키면서 호기당당하게 청단장에를 들어갔던 것이요. 장에 볼일을 다 보고 질풍신뢰와 같이 곡산읍으로 들이 몰아서 곡산 군수를 잡아 죽였으니 이것은 그놈이 학정을 하여서 인민을 어육을 삼는다 하기로 체천 행도를 한 것이었소." 하고 말을 마쳤다.
 "그러면 이번 징역이 그 사건 때문이요?"하고 내가 묻는 말에 그는, "아니오. 만일 그 사건이라면 5년 만으로 되겠소? 기위면키 어려울 듯하기로 대단치 아니한 사건 하나를 실토하여서 5년 징역을 졌소이다."
 나는 그들이 새 동지를 구할 때에 어떻게 신중하게 오래 두고 그 인물을 관찰하는 것이며, 이만하면 동지가 되겠다고 판단한 뒤에도 어떻게 그의 심지를 시험하는 것이며, 이 모양으로 동지를 고르기 때문에 한 번 동지가 된 뒤에는 서로 다투거나 배반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며, 장물(도적한 재물)을 나눌 때에 어떻게 공평하다는 것이며, 또 동지의 의리를 배반하는 자가 만일에 있으면 어떻게 형벌이 엄중하다는 것도 김진사에게 들었다.
 인물을 고를 때에는 먼저 눈 정기를 본다는 것이며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동지의 처첩을 범하는 것과 장물을 감추는 것이요, 상 중에 가장 큰 상은 불행히 관에 잡혀가더라도 동지를 불지 아니하는 것이니 이러한 사람을 위하여서는 그 가족이 편안히 살도록 하여 준다는 말도 들었다. 김진사의 말을 듣고 나는 나라의 독립을 찾는다는 우리 무리의 단결이 저 도적만도 못한 것을 무한히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여기서 나는 동지 도인권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는 본시 용강 사람으로 노백린, 김희선, 이갑 등이 장령으로 있을 때에 군인이 되어서 정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군대가 해산되매 향리에 돌아와 있는 것을 양산학교 체육 선생으로 초빙하여 와서 우리와 동지가 되어 이번 사건에도 10년 징역을 받고 나와 같이 고생을 하게 된 사람이다. 이때에 옥중에서는 죄수를 모아서 불상 앞에 예불을 시키는 예가 있었는데, 도인권은 자기는 예수교인이니 우상 앞에 고개를 숙일 수 없다 하여 아무리 위협하여도 고개를 빳빳이 하고 있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서 마침내 강제로 시키지 아니하기로 작정이 되었다.
 또 옥에서 상표를 주는 것을 그는 거절하였다. 자기는 죄를 지은 일도 없고 따라서 회개한 일도 없으니 개준을 이유로 하는 상표를 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 그 후에 가출옥을 시킬 적에도 도인권은, 내가 본래 무죄한 것을 지금 와서 깨달았으니 판결을 취소하고 나가라 하면 나가겠지마는 가출옥이라는 '가'자가 불쾌하니 아니 받는다고 버티어서 옥에서도 할 수 없이 형기를 태우고 도로 내보냈다.
 도인권의 이러한 행동은 강도로서는 능히 못할 일이라, '만산고목일지청'의 기개가 있었다.
 '홀로 높고 정갈하여 구애됨이 없으니 천하를 홀로 걸으매 누가 나를 짝하랴.(巍巍落落赤裸裸 獨步乾坤誰伴我)' 라고 한 불가의 귀절을 나는 도군을 위하여 한 번 읊었다.
 하루는 나가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일을 중지하고 명치가 죽었다는 것과 그 때문에 대사를 내린다는 말을 하였다. 이 때문에 최고 2년인 보안법 위반에 걸린 동지들은 곧바로 나가고 나는 8년을 감하여 7년이 되고 김홍량 기타 15년은 7년을 감하여 8년이 되고 10년이라도 다 그 비례로 감형이 되었다. 그런 뒤 여러 달이 지나서 또 명치의 처가 죽었다 하여 다시 잔기의 3분지 1을 감하니 내 형은 5년 남짓한 경형이 되고 말았다.
 이때 종신이던 것이 20년으로 감하여진 안명근은 형을 가하여 죽임을 받을지언정 감형은 아니 받는다고 항거하였으나 죄수에게 대하여서는 일체를 강제로 집행하는 것인즉 감형을 아니 받을 자유도 죄수에게는 있지 아니하다 하여 필경 20년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는 안명근은 새로 지은 마포 감옥으로 이감이 되어서 다시는 그의 면목을 대할 기회도 없게 되었다. 안명근은 전후 17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연전에 방면되어 신천 청계동에서 그 부인과 같이 여생을 보내고 있더니 아령에 있는 그 부친과 친 아우를 그려서 권하고 그리로 가던 길에 만주 화룡현에서 만고의 한을 품고 못 돌아올 길을 떠나고 말았다.
 이렇게 연거푸 감형을 당하고 보니 이미 꺾어 버린 3년 남짓을 떼면 나머지 형기가 2년밖에 아니된다. 이때부터는 확실히 세상에 나가서 활동할 희망이 생겼다. 나는 세상에 나가면 무슨 일을 할까, 지사들이 옥에 다녀 나가서는 왜놈에게 순종하여 구질구질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니 나도 걱정이 되었다. 나는 왜놈이 지어준 뭉우리돌대로 가리라 하고 굳게 결심하고 그 표로 내 이름 김구를 고쳐 김구라 하고 당호 연하를 버리고 백범이라고 하여 옥중 동지들께 알렸다. 이름자를 고친 것은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하는 뜻이요, '백범'이라 함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 하는 내 원을 표하는 것이니 우리 동포의 애국심과 정도를 그만큼이라도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한 독립국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나는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를 닦을 때마다 하나님께 빌었다. 우리 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여 보고 죽게 하소서 하고.
 나는 앞으로 2년을 다 못 남기고 인천 감옥으로 이감이 되었다. 나는 그 원인을 안다. 내가 서대문 감옥 제 2과장 왜놈하고 싸운 일이 있는데 그 보복으로 그놈이 나를 힘드는 인천 축항공사로 돌린 것이었다.
 여러 동지가 서로 만나고 위로하며 쾌활하게 3년이나 살던 서대문 감옥과 작별하고 40명 붉은 옷 입은 전중이 떼에 편입이 되어서 쇠사슬로 허리를 얽혀서 인천으로 끌려갔다. 무술년 3월 초열흘날 밤중에 옥을 깨뜨리고 도망한 내가 17년 만에 쇠사슬에 묶인 몸으로 다시 이 옥문으로 들어올 줄을 누가 알았으랴.
 문을 들어서서 둘러보니 새로이 감방이 증축되었으나 내가 글을 읽던 그 감방이 그대로 있고 산보하던 뜰도 변함이 없다. 내가 호랑이같이 소리를 질러 도변이 놈을 꾸짖던 경무청은 매음녀 검사소가 되고 감리사가 좌기하던 내원당은 감옥의 집물을 두는 곳간이 되고, 옛날 주사, 순검이 들끓던 곳은 왜놈의 천지를 이루었다. 마치 죽었던 사람이 몇 십 년 후에 살아나서 제 고향에 돌아와서 보는 것 같다. 감옥 뒷담 너머 용동 마루터에서 옥에 갇힌 불효한 이 자식을 보겠다고 우두커니 서서 내려다보시던 선친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오늘의 김구가 그날의 김창수라고 하는 자가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감방에 들어가니 서대문에서 먼저 전감된 낯익은 사람도 있어서 반가웠다. 어떤 자가 내 곁으로 쓱 다가앉아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그분 낯이 매우 익은데, 당신 김창수 아니오." 한다.
 참말 청천벽력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본즉 17년 전에 나와 한 감방에 있던 절도 10년의 문종칠이었다. 늙었을망정 젊을 때 면목이 그대로 있다. 오직 그때와 다른 것은 이마에 움쑥 들어간 구멍이 있는 것이었다. 내가 의아한 듯이 짐짓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제 낯바닥을 내 앞으로 쑥 내밀어 나를 쳐다보면서, "창수 김서방. 나를 모를 리가 있소. 지금 내 면상에 이 구멍이 없다고 보면 아실 것 아니오? 나는 당신이 달아난 후에 죽도록 매를 맞은 문종칠이요, 그만하면 알겠구려." 하는데는 나는 모른다고 버틸 수가 없어서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그 자가 밉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문가는 나에게, "당시에 인천 항구를 진동하던 충신이 무슨 죄를 짓고 또 들어오셨소?" 하고 묻는다. 나는 귀찮게 생각하여서, "15년 강도요." 하고 간단히 대답하였다.
 문가는 입을 삐죽거리며, "충신과 강도는 상거가 심원한데요. 그때의 창수는 우리 같은 도적놈들과 동거케한다고 경무관한테까지 들이대지 않았소? 강도 15년은 맛이 꽤 무던하겠구려." 하고 빈정거린다.
 나는 속에 불끈 치미는 것이 있었으나 문의 말을 탓하기는 고사하고 빌붙는 어조로, "충신 노릇도 사람이 하고 강도도 사람이 하는 것 아니오? 한때에는 그렇게 놀고 한때에는 이렇게 노는 게지요. 대관절 문 서방은 어찌하여 또 이렇게 고생을 하시오?" 하고 농쳐 버렸다.
 "나요? 나는 이번까지 감옥 출입이 일곱 번째니 일생을 감옥에서 보내는 셈이요."
 "역한(징역 기한)은 얼마요?"
 "강도 7년에 5년이 되어서 한 반 년 지내면 또 한 번 세상에 다녀오겠소."
 "또 한 번 다녀오다니, 여보시오 끔찍한 말도 하시오. 또 여기를 들어와서야 되겠소?"
 "자본 없는 장사가 거지와 도적질이지요. 더우기 도적질에 맛을 붙이면 별 수가 없습니다. 당신도 여기서는 별꿈을 다 꾸리다마는 사회에 나가만 보시오. 도적질하다가 징역한 놈이라고 누가 받아 주오? 자연 농공상에 접촉을 못하지요. 개눈에는 똥만 보인다고 도적질하던 놈은 배운 길이 그것이라 또 도적질을 하지 않소?"
 문가는 이렇게 술회를 한다.
 "그렇게 여러 번째라면 어떻게 감형이 되었소?" 하고 내가 물었더니 문은, "번번이 초범이지요. 지난 일을 다 말했다가는 영영 바깥 바람을 못 쏘여 보게요?" 하고 흥 하고 턱을 춘다.
 나는 서대문에 있을 적에 어떤 강도가 중형을 지고 징역을 하는 중에 그의 공범으로서 잡히지 않고 있다가 횡령죄의 경형으로 들어온 것을 보고 밀고하여 중형을 지우고 저는 감형을 받아서 다른 죄수들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을 보았다. 이것을 생각하니 문가를 덧들여 놓았다가는 큰일이다. 이자가 내가 17년 전의 김창수라는 것을 밀고하거나 떠벌리는 날이면 모처럼 일년 남짓하면 세상에 나가리라던 희망은 허사가 되고 만다. 그래서 나는 문가에게 친절 또 친절하게 대접하였다. 사식도 틈을 타서 문가를 주어 먹게 하고 감식(감옥에서 주는 밥)이라도 문가가 곁에 있기만 하면 나는 굶으면서도 그를 먹였다. 이러다가 문가가 만기가 되어 출옥할 때에 나의 시원함이란 내가 출옥하는 것 못지 아니하였다.
 나는 아침이면 다른 죄수 하나와 쇠사슬로 허리를 마주 매어 짝을 지어 축항 공사장으로 나갔다. 흙지게를 등에 지고 십여 길이나 되는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는 것이다. 서대문 감옥에서 하던 생활은 여기 비기면 실로 호강이었다. 반 달 못하여 어깨는 붓고 등은 헐고 발은 부어서 운신을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면할 도리는 없었다. 나는 여러 번 무거운 짐을 진 채로 높은 사닥다리에서 떨어져 죽을 생각도 하였으나 그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 나와 마주 맨 사람은 대개 인천에서 구두켤레나 담뱃갑이나 훔치고 두서너 달 징역을 지는 판이라 그런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도 편하려 하는 잔꾀를 버리고
 '더울 때는 더위로 도리를 죽이고 추울 때는 추위로 도리를 죽여라.(熱則熱殺闍梨, 寒則寒殺闍梨)' 의 불교 선가의 병법으로 일하기에 아주 몸을 던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였더니 몸이 아프기는 마찬가지라도 마음은 편안하였다. 이렇게 한 지 두어 달에 소위 상표라는 것을 주었다. 나는 도인권과 같이 이를 거절할 용기는 없고 도리어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날마다 축항공사장에 가는 길에 나는 17년 전 부모님께 친절하던 박영문의 물상객주집 앞을 지났다. 옥문을 나서서 오른편 첫째집이었다. 그는 후덕한 사람이요, 내게는 깊은 동정을 준 이였다. 아버지와는 동갑이라 해서 매우 친밀히 지냈다고 했다. 우리들이 옥문으로 들고 날 때에 박노인은 자기 집 문전에 서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목전에 보면서도 가서 내가 아무개요 하고 절할 수 없는 것이 괴로웠다.
 박씨 집 맞은편 집이 안호연의 물상객주였다. 안씨 역시 내게나 부모님께나 극진하게 하던 이었다. 그도 전대로 살고 있었다. 나는 옥문을 출입할 때마다 마음으로만 늘 두 분께 절하였다.
 7월 어느 심히 더운 날 돌연히 수감인 전부를 교회당으로 부르기로, 나도 가서 앉았다. 이윽고 분감장인 왜놈이 좌중을 향하여, "55호!" 하고 부른다. 나는 대답하였다. 곧 일어나 나오라 하기로 단위로 올라갔다. 가출옥으로 내보낸다는 뜻을 선언한다. 좌중 수인들을 향하여 점두레를 하고 곧 간수의 인도로 사무실로 가니 옷 한 벌을 내어 준다. 이로써 붉은 전중이가 변하여 흰 옷 입은 사람이 되었다. 옥에 맡아 두었던 내 돈이며 물건이며 내 품값이며 조수히 내어준다.
 옥문을 나서서 첫번째 생각은 박영문, 안호연 두 분을 찾는 일이었으나 지금 내가 김창수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이롭지 못할 것을 생각하고 안 떨어지는 발길을 억지로 떼어서 그 집 앞을 지나 옥중에서 사귄 어떤 중국 사람의 집을 찾아가서 그날 밤을 묵었다.
 이튿날 아침에 전화국으로 가서 안악 우편국으로 전화를 걸고 내 아내를 불러달라고 하였더니 전화를 맡아 보는 사람이 마침 내게 배운 사람이라 내 이름을 듣고는 반기며 곧 집으로 기별한다고 약속하였다.
 나는 당일로 서울로 올라가 경의선 기차를 타고 신막에서 일숙하고 이튿날 사리원에 내려 배넘이 나루를 건너 나무리벌을 지나니 전에 없던 신작로에 수십 명 사람이 쏟아져 나오고 그 선두에 선 것은 어머니이셨다. 어머니는 내 걸음걸이를 보시며 마주 오셔서 나를 붙들고 낙루하시면서,
 "너는 살아왔지마는 너를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던 화경이 네 딸은 서너 달 전에 죽었구나. 네게 말할 것 없다고 네 친구들이 그러길래 기별도 아니하였다. 그나 그뿐인가. 일곱 살밖에 안 된 그 어린 것이 죽을 때에 저 죽거든 아예 옥중에 계신 아버지한테 기별 말라고 아버지가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이 상하겠느냐고 그랬단다." 하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 후에 곧 화경의 무덤을 찾아 보아 주었다. 화경의 무덤은 안악읍 동쪽 산기슭 공동묘지에 있었다.
 어머니 뒤로 김용제 등 여러 사람이 반갑게, 또 감개 깊게 나를 맞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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